한국 현대소설은 내 현실의 어두운 단면을 끌어내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 희망찬 해답을 제시하는 편이 좋은가 하면, 또 그건 위선적으로 보여 불편하다. 피하고 나서 이유를 찾아 갖다 붙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내가 한국 현대소설을 피하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다. 그런데 며칠 전 이웃 한규 군으로부터 두 권의 책이 도착했다. 두 권 모두 한국 문학을 주름잡고 있는 여성작가의 책이다. 평소 잘 읽지 않는 책이 도착한 터라, 택배를 받아주신 어머니는 왠일이냐며 의아해하셨다.
평소의 취향과 다른 데다가 어머니가 의아해하셔도 집에 오는 책은 읽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좋아하는 청년, 한규 군의 선물이 아니던가. 낯선 세계, 아니 실은 익숙한 세계와 잠시 대면했다. 예상대로 불편하긴 했다. 인간 내면의 여러 불편한 부분 중, 이 소설집에 담긴 부분은 '고독'이었다. 소설이란 것이 대개 어떤 인간의 독백이거나 어떤 인간에 대한 집중 분석이기에, 소설에서 고독을 떼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선 그 이상으로 고독을 파헤친다. 우연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고, 소외의 근원을 추적하는 등 현재 자신의 고독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각자의 답을 찾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고독한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나의 고독의 형태와 구성물질을 파악할 수는 없다. 이야기의 허술함이나 나의 아둔함 때문이 아닐 것이다.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그랬듯 나 역시 고독을 맞이하고 감내해야 할 한 인간일 뿐이지, 그걸 물리칠 수 있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으며 극복 비슷한 걸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세상에 나의 고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역시 예상대로 불편하지만, 생각보다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다행이네.
그날 오피스텔로 찾아왔던 남자의 말을 유진은 한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굴러가요. 더러움과 증오와 한심함으로 가득차 있어요. 솔직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모두 정밀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나는 아마 각본대로 뛰지 않는 토끼일 거예요. (의심을 찬양함, 37쪽)
이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서로 몹시 달라요. 화를 잘 내는 나도 있고 수줍은 나도 있고 말 잘하는 나도, 어리석은 나도, 그리고 아름다운 나도 혐오스러운 나도 다 있어요. 그것들은 흩어져 존재하지만 어느 한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 갑자기 사람들의 눈에 띄게 돼요. 외롭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에요. (고독의 발견, 58쪽)
그 일을 전해들은 엄마가 가벼운 빈혈이라고 쉽게 넘겨버린 것과는 상관없이 그날 이후 B는 자신이 희귀한 병을 갖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왜 자신이 그토록 평범하게 태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어쩌면 아주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보호하기 위해서 일부러 보통 사람처럼 성장하도록 조건을 만들어놓은 것일 수도 있었다. B의 머릿속에는 희귀한 병을 통해 태생의 고귀한 신분을 깨닫게 된다는 한가지 몽상이 보태졌다. 아아, 인생은 얼마나 많은 암호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것일까. (날씨와 생활, 119쪽)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결정돼버렸다. 회사든 가정이든 이제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 파산이나 이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생겨도 나라는 사람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이상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 바에야 모험심과 열정 따위는 필요없게 되며 따라서 현상유지 이상의 에너지가 분비되지 않는다. 어느정도 정점에 이른 사람은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지 몰라도 더이상 자신의 속에서 미지와 신비를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행복한 것도 아니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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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다고 하시니, 저는 반대로 더 끌리는 책이군요-ㅅ -) 나만의 고독을 만나볼수 있을 것 같네요.
2012/02/06 15:59 [ ADDR : EDIT/ DEL : REPLY ]자신의 고독을 마주하기에 좋은 책이긴 해요. :)
2012/02/08 00:02 [ ADDR : EDIT/ DEL ]